"역사는 영웅을 소명해 쓰고, 그 소명이 끝나면 가차없이 버린다." 던 사극 <한명회>의 대사는 이 시대를 비유하는 가장 통찰력 있는 대사 중 하나였다. 사극은 '픽션' 이기도 하지만 또한 '역사' 를 담고 있다. 역사를 담고, 역사를 말하고, 역사를 부르짖는 사극의 힘, 과연 한국 방송 50년의 역사와 그 물줄기를 함께 했던 사극의 '역사' 는 어떠했을까.
한국 사극 50년사(史), 그 찬란한 역사를 되짚어 보기로 하자.
1960~70년대 당시 여의도의 사정은 '신상옥' 이라는 거대 감독이 버티고 있던 충무로와는 달리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갓난아기 같았다. 소재개발도 어려웠던데다가 작가수도 한정되어 있던 탓에 혁신적인 방송을 내보낼 수 없었던 여의도는 사극 작가들을 중심으로 소재 개발도 쉽고,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사극을 주요 방송 라인업으로 편성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 바로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르기 시작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임충과 신봉승이었다. 특히 신봉승은 박정희 정권의 검열에 맞서 야사(野史)를 중심으로 한 사극들을 대거 써내며 눈길을 모았는데 이 때 만들어진 사극들이 바로 <옥녀><안국동 아씨> 같은 걸출한 작품들이었다. 신봉승의 행보가 바빠지면서 쌍두마차를 이루던 임충의 움직임도 부산해졌다.
수많은 사극들을 통해 MBC 드라마의 구원투수를 톡톡히 한 임충은 충무로와 여의도를 넘나들면서 시대극과 역사극의 '달인' 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한국 사극의 역사를 임충과 신봉승이라는 걸출한 작가들을 빼 놓고 논하기에는 어려울 지경이라 하겠다.
60~70년대에는 임충, 신봉승 같은 스타작가들도 탄생했지만 김재형 같은 스타 PD도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도 사극의 산 증인 소리를 듣고 있는 김재형은 박진만이 극본을 쓰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소재로 한 <국토만리> 를 연출하며 화려한 신고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김재형이 오늘날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40년 동안 사극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그만의 열정 때문이기도 하다.
80년대에 이르러 컬러 TV가 도입되면서 한국 드라마와 함께 사극 역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다. 이 때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며 등장한 사극이 바로 MBC의 <조선왕조 500년> 이었다. 조선 태조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500년 조선왕조의 역사를 장장 8년여에 걸쳐 그려낸 <조선왕조 500년> 은 시청률과는 별개로 존재만으로도 찬란함이 돋보였다.
<조선왕조 500년> 을 연출한 이병훈은 비로소 스타 PD로 이름을 날리며 한국 방송사에 그 가치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 작품과 함께 동반출세의 길을 걸었다. 물론 <조선왕조 500년> 의 대업은 이병훈 뿐 아니라 작가 신봉승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대 최고의 조합 중 하나였던 신봉승-이병훈 콤비의 힘은 이처럼 막강했다 할 수 있겠다.
다시 한번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살펴보면 제 1화 <추동궁 마마> 로 첫발을 내딛었고 세종과 장영실의 일대기를 다룬 제 2화 <뿌리 깊은 나무>, 인수대비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낸 제 3화 <설중매>, 정난정의 등장과 몰락을 그린 제 4화 <풍란>, 충무공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제 5화 <임진왜란> 으로 이어졌다.
그 뿐인가. 제 6화 <회천문> 은 김개시와 광해군의 일대기를, 제 7화 <남한산성> 은 임경업 장군의 삶을 열정적으로 그려냈고 제 8화 <인현왕후> 가 대히트를 치면서 전인화가 톱스타의 위치에 올라서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 후, 최명길과 최수종이 열연한 제 9화 <한중록>, 정조의 삶을 다룬 제 10화 <파문>, 김희애가 명성황후로 활약했던 제 11화 <대원군>까지 지금이라면 시도도 못할 어마어마한 업적이라고 하겠다.
80년대 사극이 <조선왕조 500년> 으로 모두 대변되었다면 90년대는 다양한 사극들이 대거 출품되면서 '사극의 전성시대' 를 이끌어냈다. 이 중 눈에 띄는 작품은 누가 뭐래도 신봉승의 <한명회> 였다. 40%를 넘나드는 시청률로 전국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한명회> 는 이덕화가 한명회로, 서인석이 세조로, 김영란이 인수대비로 분했던 작품이었다.
신봉승의 <한명회> 가 방영되기 직전만 해도 한명회는 조선왕조 최고의 간신이자 사육신과 대비되는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명회> 가 인기를 끌면서 그는 왕권이 약화되던 단종시대를 철인군상과 같은 의지로 뒤엎고 결국은 성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명신(名臣)' 이라는 재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한명회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자면 비록 축재와 부정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인물이지만 계유정난을 성공으로 이끌고 세조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 세 번의 공신 책봉으로 영화의 극을 누렸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 말년에 변방의 일을 도맡아하며 민심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점, 예종시대의 과도기를 현명하게 처리하고 성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A+를 주고 싶다.
그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화려하지만, 가장 멋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세 명의 딸 중 두 명이 왕비가 되었고 한 명은 신숙주의 며느리로 들어갔다는 점만 보아도 그 대단한 '힘' 을 느낄수 있겠지만 성종의 친정을 돕기 위해 말년에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기부해 청사에 길이남을 찬사를 받았던 것 또한 우리가 모르는 '거인' 한명회의 모습이다.
(아, 이야기가 딴데로 새버렸다.......)
<한명회>로 94년을 아주 행복하게 보냈던 KBS 는 하희라 주연의 <찬란한 여명> 으로 쓴 맛도 맛봤다. 제작비 100억을 들이면서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했던 <찬란한 여명> 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을 소재로 <한명회> 에 버금가는 기대를 모았으나 10%를 겨우 넘는 시청률로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하희라가 명성황후를 열연했고, 변희봉이 대원군을 맡았으니 배우들의 이름만으로도 채널이 돌아갈 것 같았는데 실패를 했으니 KBS 로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을터. 하지만 '명성황후' 라는 소재 자체가 한말 비극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해피엔딩' 을 좋아하는 안방극장의 특성상 크게 환영받을만한 소재는 아니라는 것이 일각의 의견이다.
1995년에 일국의 국모인 '명성황후' 가 쪽박을 깬데 비해 한낱 후궁인 '장녹수' 와 '장희빈' 은 대박 중 대박을 쳤다. 95년을 '여인천하' 로 물들였던 KBS <장녹수> 와 SBS <장희빈> 은 피말리는 시청률 대결을 하며 안방극장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는데 결과는 KBS <장녹수> 의 판정승이라 하겠다.
유동근이 연산을 박지영이 장녹수를 맡아 화제를 모았던 <장녹수> 는 스타 작가 정하연이 탄력을 받으면서 히트를 쳤고 연산군과 인수대비(반효정 分) 의 치열한 신경전과 요부 장녹수의 파란만장한 삶이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며 흥행면에서 성공을 거뒀다. <장녹수> 가 방영되는 날이면 항상 TV 를 켜 놓으셨던 부모님의 모습도 생각난다.
<장녹수> 가 결말로 치달으면서 SBS <장희빈> 도 초반의 부진을 씻고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정선경이 장희빈을, 김원희가 인현왕후를 맡아 'SBS가 자충수를 두었다' 라는 비웃음을 받았던 <장희빈> 은 집필 작가 임충의 저력이 살아나면서 40% 가 넘는 빅 히트를 이루었고 SBS가 시도한 첫 사극으로 상큼한 스타트를 끊었다.
<장희빈> 에 대한 이야기는 영상비평방과 nowwetalk 에 여러번 남겨 놓았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찾아서 읽어보시길.
1996년에 들어서 사극은 한층 더 발전하기 시작하는데 96년 대표적인 사극이라 하면 단연 <용의 눈물> 을 꼽을 수 있겠다. 이제는 A+급 작가로 우뚝선 이환경의 생애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용의 눈물> 은 태조와 태종의 파란만장한 삶을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그려내며 흥행과 작품성면에서 일대 쾌거를 이뤘다.
태종 이방원 역을 맡았던 유동근과 원경왕후 민씨를 표독스럽게 잘도 소화해 낸 최명길의 연기대결은 그야말로 압권이었으며 이들의 윗자리에서 나에게 지독히도 강한 인상을 남긴 故김무생 선생의 연기 역시 일품이었다. 이환경의 집필 뿐 아니라 김재형이 연출을 맡았으니 작가, 연출, 배우 삼박자가 이처럼 똑 떨어지는 작품도 찾아보기 힘들 듯 하다.
유동근은 이 작품으로 K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96년에는 <용의 눈물> 도 있었지만 SBS <임꺽정> 도 있었다.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정흥채가 신들린 듯 연기해 화제를 모았던 <임꺽정>은 사극이지만 현대물 같은 스피디한 진행과 남자들의 우정, 여자들의 지혜를 마음껏 펼쳐 보이며 안방극장의 갈채를 받은 작품이었다. KBS의 정통 사극에 맞선 SBS의 현대 사극이라고 하면 맞을까.
어쨌든 이 때 <임꺽정> 의 인기는 <용의 눈물> 을 압도할 정도였으며 불과 1년전에 조숙한 '인현왕후' 를 연기했던 김원희가 임꺽정의 억척스러운 부인으로 변신해 어린 나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때때로 일기장을 펴 볼때가 있는데 "오늘 임꺽정을 봤는데 인현왕후가 임꺽정의 부인이 되어있었다. 못된 장희빈이 내 ?i아서 임꺽정하고 결혼했나보다. 못된 장희빈!" 이라고 써져 있는 걸 보면 우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다.
마지막 임꺽정이 화살을 수 십대씩 맞고 눈밭에 쓰러질 때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지. 케이블에서 재방송을 하게 되면 꼭, 꼭 챙겨보고 싶은 작품이다.
1996년부터 98년까지 2년여에 이르는 시간 동안 숱한 화제를 뿌리며 화려하게 종영한 <용의 눈물> 의 바통을 이어 받은 작품이 바로 <왕과 비> 였다. 98년 IMF가 터지면서 나라가 '망하느니, 사느니' 하는 시점에 불안하게 출발한 <왕과 비> 는 제작비 절감차원에서 <용의 눈물> 의 배경음을 그대로 사용하는 촌극을 연출했고 <용의 눈물> 의 5분의 1도 안되는 저조한 시청률로 KBS의 탄식을 자아냈다.
세조와 한명회라는 절대 흥행불변의 소재에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왕과 비> 의 내우외환은 임동진, 최종원 등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을 무색하게 했고 <조광조><장녹수> 등을 성공으로 이끌며 '흥행전도사' 소리를 달고 살았던 작가 정하연의 상황도 난처하게 만들었다. IMF는 사회, 경제 뿐 아니라 이처럼 가장 화려하다 여겨지는 여의도에도 시퍼런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어려운 상황이 거듭되며 지지부진한 답보 상태를 보이던 <왕과 비> 가 본격적으로 안방극장을 장악하기 시작한 때는 바로 '비(妃)' 의 시대가 열리면서였다. 세조의 시대가 끝나고 성종과 인수대비, 연산군과 폐비윤씨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비(妃)' 의 시대는 사실상 <왕과 비> 2기의 성격을 띠었고 한동안 뒷전으로 물러나 있던 채시라가 원톱으로 등장했다.
정난, 좌익공신과 좌의정의 위세를 누렸던 한확의 딸로 태어나 수양대군의 맏며느리로 들어갔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빈의 책봉을 받았으며,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궐 밖을 나와야만 했던, 그러나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꺼지지 않는 야망으로 결국은 둘째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스스로 대비와 대왕대비의 위세를 누렸던 '인수대비' 의 파란만장한 삶이야 말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하지 않았겠는가.
인수대비와 연산군의 갈등이 치솟아 오를수록 안방극장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왕과 비> 는 종영 때에는 44%라는 놀라운 시청률로 전체 시청률 2위를 차지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1998년에 KBS가 <왕과 비> 의 축포를 쏘아올렸다면 SBS는 <홍길동> 을 방영하며 전국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연극무대에서 활약했던 김석훈의 첫 데뷔작이기도 한 <홍길동> 은 <임꺽정> 같은 픽션이 가미된 현대사극으로 KBS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전통사극에 맞서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의적' 홍길동이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장면에서 국민들은 IMF를 초래한 무능한 정부를 처단하는 듯한 짜릿함을 맛봤고 김원희와 박상아를 두고 고민하는 김석훈의 모습에서 '인간다움' 역시 느꼈다. 드라마는 '재미' 있어야 하나 '시대' 를 담고 있어야 한다. 말초적인 재미가 드라마의 전부가 아니라는 고금의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지 않는가.
(아, 김원희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을 꺼낼 수 밖에 없겠는데 <임꺽정> 에서 왈가닥으로 변신했던 김원희는 <홍길동> 에서 '인현왕후' 같은 요조숙녀 이미지로 복귀해 나를 엄청 혼란스럽게 했다.)
<왕과 비> 가 1999년 종영할 당시 44%라는 엄청난 시청률을 올렸음에도 전체 시청률 2위를 차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허준> 이라는 '국민 사극' 이 굳건하게 1위 자리를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사극의 물줄기를 완전히 뒤바꿔버리며 새로운 변혁을 예고했던 <허준> 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주연과 조연의 섬세한 조화, 방대한 자료와 디테일한 집필, 감탄할 정도로 놀라운 연출력으로 인해 시청률 60%를 넘나들었던 드라마 <허준> 은 주연을 맡은 전광렬 뿐 아니라 황수정, 임현식, 최란 등의 이름값을 천정부지로 솟게 만들었고 특히 연출을 맡은 이병훈은 '영원한 흥행사' 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번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 드라마를 어찌 세 네문단의 짧은 말로 모두 평가할 수 있으랴. 하지만 분명한 것은 <허준> 이 이병훈 표 '민중사극' 의 첫 스타트를 깔끔하게 끊었으며 이로써 한국 사극에 역사적인 한 획을 그었다는 점일 것이다.
1999년 <허준> 과 <왕과 비> 로 대변되는 '대박 사극' 은 2000년 <태조 왕건> 이 출범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후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사극의 장으로 끌어들이며 조선시대를 탈피했던 <태조 왕건> 은 <용의 눈물> 로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른 이환경이 다시 한번 집필을 맡아 대내외적인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KBS는 이 작품에 '사활을 걸었다' 라는 표현까지 쓰며 <태조 왕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KBS 맨' 최수종이 왕건을, 김영철이 궁예를, 서인석이 견훤을 맡아 연기파 배우들의 이름값이 작품을 압도하는 보기 드문 현상까지 일어났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대성공. <태조 왕건> 은 50%를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시청률로 2000년부터 2002년에 이르기까지 안방극장 '제왕' 의 위엄을 과시했다.
특히 궁예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김영철의 연기는 일품 중의 일품이었다. '옴마니 반메홈' '관심법' 등 수많은 유행어를 히트시킨 김영철은 영혼을 담은 연기로 '궁예' 를 이 시대 가장 역동적인 인물로 되살려냈고 그 해 KBS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그 이름값을 공고히 했다. 아직도 그의 모습에서 궁예를 느끼는 이가 적지 않으니 이 때 그가 보여준 연기의 아우라야 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하겠다.
2002년에 들어서면서 '사극' 은 전에 없는 부흥기를 맞는다. 전체 시청률 1위와 3위를 사극이 독식하는 기현상까지 발생한 2002년은 1위 <태조왕건>, 2위 <여인천하>, 3위 <명성황후> 로 여의도 전체가 사극붐으로 행복해하던 시절이었다. <태조왕건> 의 독주 속에 그 독주를 막아 선 것이 바로 <여인천하> 였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 하다.
회당 700만원이라는 당시 최고액을 받으며 화려하게 브라운관에 복귀한 강수연은 <여인천하> 의 '정난정' 역할을 실감나게 소화해내며 찬사를 받았고 '문정왕후' 전인화와 '경빈 박씨' 도지원의 포쓰 역시 강수연에 모자라지 않았다. 김재형이 SBS로 옮겨와 내 놓은 첫번째 작품이기도 한 <여인천하> 는 눈에 띄는 상승세로 <태조 왕건> 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여인천하> 가 이른바 '강수연 효과' 에 힘입어 <태조 왕건> 을 바짝 따라 붙을 즈음에 KBS 는 <명성황후> 를 방영하며 <여인천하> 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물론 <여인천하> 가 월화 드라마였고 <명성황후> 는 수목드라마 였으나 '여걸' 이 소재라는 점과 강수연에 맞먹는 '이미연 효과' 를 톡톡히 봤다는 점에서 네티즌들간의 신경전이 대단했었다.
초반 13% 대의 시청률로 출발한 <명성황후> 는 이미연의 출연과 함께 2배가 넘는 시청률 상승을 기록하며 방영 10회만에 26% 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여인천하> 가 고수하고 있던 시청률 2위를 가로채며 승승장구 했다. 후에 <여인천하> 가 본격적으로 경빈박씨와 문정왕후의 갈등을 부각시키자 <명성황후> 는 원자를 잃고 강녕전에서 오열하는 이미연의 열연으로 맞불을 놓아 최고 시청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여인천하> 는 생살부, 중전 회임 등 파격적인 사건을 통해 다시 승기를 잡았고 한 때 최고 시청률 35%까지 기록했던 <명성황후> 는 지지부진한 전개와 이미연의 집중도가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20%대 시청률로 추락하며 하락세를 걸었다. 이 후, <명성황후> 는 뮤직비디오를 통해 '명성황후 열풍' 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으나 이미연이 도중하차 하고 최명길이 교체투입 되면서 안방극장의 외면을 받고 말았다.
<태조왕건><여인천하><명성황후> 등으로 불어닥친 '사극 열풍' 은 채 1년도 되지 않아 그 한계점을 드러냈다. <태조왕건> 의 후속으로 방영된 <제국의 아침> 이 싸늘한 외면을 받은데다가 KBS <장희빈> 의 초반 실패 역시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했다.
거품이 빠지기 시작하자 각 방송사는 사극의 편수를 대거 줄이면서 다시 멜로와 트렌디로 복귀했고 영화 <바람난 가족> 까지 포기하면서 <장희빈> 으로 달려온 김혜수로서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식은땀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별을 쏘다><올인> 등 히트 드라마를 경쟁작으로 두며 두 자릿수도 안되는 시청률로 고전한 <장희빈> 은 인현왕후가 출궁하고 장희빈이 야망을 이루는 시점부터 다행히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역대 모든 장희빈이 그러했듯이 장희빈의 몰락이 가속화 될 때부터 안방극장을 장악한 <장희빈> 은 김희선 주연의 <요조숙녀> 를 가볍게 제압하며 동시간대 1위를 고수할 수 있었다. 30% 정도의 시청률로 김혜수의 이름값에 비한다면 모자랄 수도 있는 성적이었으나 김혜수는 "장희빈을 연기한 것에 만족한다." 는 반응을 보였고 2003년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갈채를 받았다.
2003년에 들어서면 사극의 전반적인 침체기 속에 <대장금> 이라는 '민중사극' 이 다시 한번 부활포를 쏘아 올리며 체면치레를 했다. 사극의 달인 이병훈이 다시 한번 연출을 맡은 <대장금> 은 생소할 수도 있는 수랏간을 배경으로 이른바 '장금이 열풍' 을 불러 일으켰고 50%가 넘는 시청률로 '국민 사극' 의 반열에 올랐다.
톱스타 이영애의 출연으로 초반부터 화제를 모은 <대장금> 은 양미경, 견미리, 여운계, 박정수 등 당대 최고의 연기파들의 열연으로 시청자들을 열광케했고 수랏간에서 의술에 이르는 방대한 소재, 치열한 심리묘사와 눈을 뗄 수 없는 긴박함으로 트렌디 드라마 못지 않은 스피디한 전개를 자랑했다.
이 때에 '한상궁' 양미경과 '최상궁' 견미리의 팬 카페가 문전성시를 이뤘으니 <대장금> 의 위세야말로 이처럼 기세등등했었다. ( <대장금> 의 경쟁작은 김재형 PD의 <왕의 여자> 였다. 재미면으로는 쏠쏠했던 작품이었는데 경쟁작을 잘못 만나 쪽박을 깬 대표적인 케이스)
<대장금> 과 함께 2003년을 열광하게 만든 사극은 <다모> 도 있었다. 정통과 민중이라는 사극의 장르 속에서 '퓨전' 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며 사극에 현대미를 가미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는 불후의 명대사를 남기며 승승장구한 <다모> 는 탄탄한 구성과 매니아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20%를 넘나드는 좋은 성적표를 얻었고 이 드라마는 '퓨전사극' 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장점을 다 가졌다는 호평을 받았다.
<대장금> 열풍이 한 차례 여의도를 휩쓸고 지나간 뒤 등장한 것은 바로 <해신> 이었다.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은데다가 최수종, 채시라라는 '역전의 용사' 들이 대거 등장한 <해신> 은 30%대의 시청률을 고수하며 '퓨전사극' 이라는 새로운 장르까지 탄생시켰다. 이 드라마로 송일국이 스타덤에 올랐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일.
그러나 <해신> 은 막대한 제작비와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국민사극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는데 중후반에 이르러 염장의 비중이 대단히 커지면서 장보고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점이 그 이유로 읽혀지고는 한다. 마치 염장이 <해신>의 주인공처럼 등장하면서 대척점에 서 있던 장보고의 이미지가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자미부인 채시라의 심심한 죽음 역시 시청자들의 기대를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을테고.
2005년은 역시 <불멸의 이순신> 이 있었다. 이민 계획까지 철회하며 <불멸의 이순신> 에 목숨을 걸었던 김명민은 이 시대 최고의 '이순신' 을 부활시키며 대중의 심금을 울렸고 초반 부진했던 시청률을 씻어내며 2005년 K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2005년 KBS 연기대상은 가장 극적이고,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기도 했다.
막대한 제작비 때문에 이익이 남지는 않았지만 시청률이 대순가. <불멸의 이순신> 이 보여줬던 '이순신' 의 장엄함이야 말로 한국 사회를 짓누를만한 태산교악이었다. 아직도 '김명민=이순신'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해본다.
<불멸의 이순신> 이 준 감동은 2006년 <주몽> 이 바통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2006년 <주몽> 보다 먼저 방영된 sbs <서동요> 의 선전도 있었으나 이병훈 스스로도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너무 어려웠고. 다음엔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갈 생각이다." 라는 평가를 내릴정도로 '걸작' 의 반열에 올리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MBC <주몽> 의 등장은 눈길을 끌게 된다. 초반에 비해 연장논란 등을 거치면서 힘이 빠지기는 하였으나 시청률 50%를 넘나드는 '파워' 는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술한 역사 고증에도 불구하고 '판타지' 적 상상력과 주연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이 안방극장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광렬, 오연수 등 당대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과 송일국, 한혜진 이라는 걸출한 주연배우를 앞세운 드라마 <주몽> 은 그 스케일이나 화제성 면에서 '국민 드라마' 의 반열에 올라도 크게 빠지는 모양새는 아닌 듯 하다.
![]() 2006년, MBC에 <주몽> 이 있었다면 KBS 에는 <황진이> 가 있었다. 조선 최고의 명기이자 여류 시인이었던 황진이의 삶을 담은 <황진이> 는 하지원이 타이틀롤을 맡고 중견배우 김영애가 브라운관에 복귀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드라마는 '성공' 했고 하지원은 '연기대상' 의 수상자가 됐다.
<황진이> 는 구성상 몇몇 아쉬운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분명히 발견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대장금> 의 '한상궁' 과는 달리 강인하고 카리스마 있는 스승으로 등장한 '백무' 는 시종일관 황진이를 능가하는 매력으로 안방극장을 사로잡았고 이는 곧 중견배우 김영애의 재발견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불멸의 이순신> 의 윤선주는 <황진이> 를 통해서 사극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고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심리를 충족하게 만들었다. 드라마 내용 상 황진이의 러브스토리를 줄이고 그가 성장하는 과정에 더 힘을 쏟았더라면 <대장금> 을 능가하는 좋은 드라마로 탄생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역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한다.
역사는 과거지만 그 속에는 현재와 미래가 공존한다. 언제나 가장 현명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 의 위대함은 과거, 현재, 미래에 모두 유효한 가치로움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사극' 은 그 역사를 조금 더 쉽게, 조금 더 재밌게 보여주는 수단 중 하나다. 사극이 보여주는 역사는 '사실' 이 아니지만 또한 '사실' 이며, '픽션' 이지만 또한 '픽션' 이 아니다.
사극이 담고 있는 역사, 드라마가 담고 있는 시대정신. 이것이야말로 5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사극이 변함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아니었을지. |
'신문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혁거세는 인도인이 키웠다? (0) | 2007.01.2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