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공지영





리뷰를 하기 전에 먼저 이 말은 하고 가야 한다.
공지영 작가님의 소설은 청소년인 우리에게 필독서로 지정된 책이 많다.
'봉순이 언니'도 그렇고, 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도 그렇다. 또, 얼마 전에 영화로 상영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필독서 중 하나이다.
그런 만큼 접할 기회도 많은 이 소설들은 하나같이 모두 우울하다.
사실 소설이란 그 사회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그 당시의 사회가 작가의 눈으로 보기에 우울했다면 소설 속엔 그 우울함이 녹아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지, 읽다보면 절망밖에 느껴지지 않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란 말이다.
봉순이 언니는 식모로 살면서 성씨가 다른 애들을 몇이나 데리고 다니고, 우행시에서의 주인공들은 사회적으로는 교수라는 지위에 있지만 어린시절의 아픔을 품고 자살을 여러번 시도한 여자와 사형수의 사랑이 아름답지만 '비.극.적.'으로 그려지고, 무소에서는 80년대 여성들의, 뭐랄까, 고뇌? -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 등을 나타낸다.
물론 작가님께서는 책 곳곳에 희망의 요소를 심어주려 노력하긴 하셨지만, 그래도 읽다보면 눈물이 나고 슬퍼지는 것은 공지영 작가님의 책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슬프게 사는 것 같아. 아니면 내가 너무 행복한 것일까.
으흑-! ㅠㅠ 슬픈건 싫어.


감상문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네타적인 요소가 있으므로 미리 주의드립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경의 한 구절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까.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물론, 지금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직 세상을 얼마 살지 않은 우리들에게 너무 깊은 뜻이랄까. 소설을 다 읽은 지금에도 저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겠다. 아시는 분 있으면 설명 부탁.
이 소설의 시대상은 80년대이다. (아마도. 사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여성의 지위가 조금씩 상승하지만 그 상승하는 지위와 예전의 사고방식이 충돌하는 시대. 지금이야 여성이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같은 교육을 받지만, 그 때 고등교육받았던 여성들은 엘리트였다.
무소의 주인공들도 그렇다. 혜완, 영선, 경혜.
나는 그 당시에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방송국에 취직 했었을 정도로 잘나가는 여성들. 그들은 대학 동창이다. 글을 잘썼던 영선이, 작가의 자전적인 인물 혜완이, 세상과 충돌 할 때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경혜.
그들 셋은 그 당시의 대표적인 여성을 보여준다.
남편과 자신, 둘다 공부를 했음에도 남편을 먼저 공부시키려 자신의 공부를 포기한 혜완. 남편의 공부 후에는 자신의 생활을 갖고자 한다. 일을 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여자가 무슨 일이야'라는 남편의 구박에도 직장을 나간다. 그러나 모든 세상 만사가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첫 아들, 아들이 귀한 집에서 태어나 '아들'이란 것은 시댁과 친정 모두 그녀에게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직장에 가려고 아이의 손을 잠깐 놓아 보모에게로 보내는 그 짧은 순간에, 아이는 차에 치여 죽고 만다. 그래서 혜완은 아이를 죽인 엄마, 라는 이름과,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이혼'하고 만다. 아이가 죽었을 때 혜완은 말한다. 내가 아이의 손을 놓친 몇 초의 시간을 신은 허용하지 않았다, 라고. 요즘에야 이혼이 너무 많아져서 별 의미를 갖지 못할 지 몰라도 그 당시엔 아니었다. - 사실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말도 웃기다. - 이혼녀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기엔 세상은 너무 거칠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혼하고 소설을 쓰며 자신만의 생활을 유지해간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여성이랄까.
경혜는 어떠했을까. 그녀는 의사 남편을 만나 아이를 얻고 주부 역할을 충실히 하며 살아가는 '평범하고 행복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 그녀가 아이를 낳고 나서 남편은 '재미'가 없어졌다고 밖에서 '적당히'즐기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몸소 그것을 실천한다. 외국에 출장이라는 명목으로 애인과 여행을 갔다 올 때면, 경혜는 아이 손을 잡고 꽃단장을 하고 그를 기다렸다. 알고 있으면서도. 호텔방에까지 찾아가기도 했었지만 그녀에게는 그 현실을 깰 힘이 없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남편과 애인이 들킬까봐 따로 떨어져 오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고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가슴에만 상처를 남겼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왜, 내가 왜 이혼해야 해?. 이혼해서는 아이를 데리고 살아갈 자신이 없기에, 그저 평범하고 행복하게 의사의 아내로써 살아가는 것이 편하기에, 세상과 타협한 것이다.
영선. 그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가난한 남편과 그는 둘 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역시 남편의 출세를 위해 자신의 시나리오를 주어 그를 성공시킨다. 그러나 그가 성공한 후에 그녀에게 다가 온 것은 고독이었다. 그는 너무 바빴다. 그녀를 돌봐줄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 소외 속에서, 제일 착하고 희생적인 그녀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에 가장 적합했던 그녀는 알코올 중독이 되고 자살을 한다.
'희생적'이라. 절대적인 희생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아무리 부모 자식간이라도, '보상심리'가 생긴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은 인간이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은 것. 부모가 자식에게 말하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군대 간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에게 말하는 '내가 널 어떻게 기다렸는데,' 이것도 '희생'이란 말의 아이러니 - 이 단어가 적합한 지 모르겠다. - 를 보여주는 것이다. 영선도 일종의 보상심리 때문에 알코올 중독이 된 것이겠지.
내가 희생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 소설이 철저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것도 뒷쪽의 '평'을 보고 알았다. 사실 '페미니즘', 또는 '아가페', 이런 단어들은 나에게 혼란을 줄 뿐이다. 또한 소설을 읽으며 그 뒷편을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지는 못한다. 나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러나 어리다는 이유로 이 모든것에서 눈을 돌리기에는 세상이 청소년들에게 요구하는 바가 너무 크다.
아직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 살아간다면 자연히 그것이 무엇인지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좀 더 앞당기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이 글을 마친다.
